나는 90년대 후반~10년대 후반 일본 서브컬쳐를 정말 좋아한다.
뭐랄까, 요즘 나오는 만화들을 보면 많은 작품들이 자극적인 소재 하나로 떠보려고 목매다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다가 운 좋게 인기를 얻으면 돈 좀 벌고, 애니화까지 되면 금상첨화다. 거기에 작가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엔딩까지 망하면… 끔찍한 일이다. 모바일 서브컬쳐 게임도 한철장사를 노리고 반짝 유행이 지나면 다시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서브컬쳐 시장도 너무 커졌다. 씹덕 문화는 이제 Too mainstream이다.
그런데 예전 작품들은 그렇지 않다. 정말 뛰어난 작가들이 스토리를 만들고, 작은 서브컬쳐 시장에 ‘도전’을 했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의 플롯 뒤틀기,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철학, <동방 프로젝트> 시리즈의 훌륭한 세계관과 ost 등… 정말 하나같이 뛰어난 작품들이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세대에도 기억될 만한 작품들만 남아 있으니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문화의 흔적을 눈으로 느껴보기 위해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세웠고, 용산 전자상가에 가보면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밴드 하던 친구들과 마침 휴가 나온 친구까지 데리고 용산으로 떠났다.
마침 연휴 첫 날이라 그런지 용산에는 차도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미슐랭 어쩌구 미나리 잘 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서 용산 전자상가로 가려는데, 예상보다 훨씬 오래걸리고 택시비도 많이 나왔다…
일부러 본 건물 말고 주변에 작고 허름한 상가들이 많은 곳에 세워달라 했다.

처음 내렸던 곳은 이미 모든 점포가 건물 철거를 위해 철수했던 4층짜리 꽤 큰 상가였다. 사람의 흔적이 끊긴 지 조금 되어 보였고, 안 잠긴 문을 잘 찾아다니면서 1층부터 4층까지 전부 돌아봤다. 사실 서브컬쳐를 탐험하려고 왔었지만, 그냥 나는 이 조용하고 묘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우리는 홀린 듯이 상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도 다행히 좋다고 해서 30분 가량 둘러보았다. 어떻게 보면 소름끼치게 보일 정도로 황폐한 장소인데, 나는 이 장소가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혼자 갔으면 좀 무서웠을 수도 있겠다.

이름 한 번씩은 들어봤을 만한 가게들이 많았다. 점포마다 벽에는 색 바래고 철 지난 컴퓨터 부품들이 그려진 포스터가 시간이 멈춘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부에선 버려진 케이블과 영수증도 찾아볼 수 있었다. 영수증에 찍힌 날짜는 2017년이었다.
아마 내가 7살 때였던 것 같다. 구구단을 외워서 아빠가 닌텐도 DS를 사주셨다. 그때 게임 칩을 구하기 위해 용산에 왔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사람이 없다는 점만 빼면.
노스텔지어가 잔뜩 차오른 상태로 우리는 다음 건물로 이동했다.

주변 다른 상가들은 다 비슷했다. 곧 철거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인가 보다. 아예 못 들어가게 막아둔 상가도 조금 있었다.

주변을 어느정도 본 것 같아서 슬슬 전자랜드 건물로 이동하는 중, 에반게리온 로고가 박힌 창문을 찾았다. 뭐하는 가게였을까? 피규어 가게? 상가 출입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가진 못했다. 용산에 도착한지 2시간 만에 처음으로 서브컬쳐의 흔적을 찾아서 기뻤다.

전자랜드에 도착했다. 용산에서 악덕 상인들이 많기로 가장 악명이 높은 곳이라는데, 굳이 돈을 쓰러 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들어갔다. 혹시나 서브컬쳐의 흔적이나 옛날 PC 게임 패키지 (불법 복제라고 할지라도), 게임보이 같은 게임기도 있을지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갔다.
1층에는 전기차 브랜드가 들어와있었다. 점점 우리나라 전자제품이 발전한다는 게 느껴졌다. 전구나 오디오 등에서 컴퓨터, 이젠 전기차로…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2층부터는 옛날 용산 느낌이 났다. 친구랑 패미컴을 찾아 돌아다녔다. 어렸을 때 집에 패미컴이 있었는데 고장나서 못 쓰게 되었다고 찾고 있었다. 낡은 오락실도 하나 있었다. 펀치 기계가 하나 있었는데, 샌드백을 직접 당겨서 내려야 할 정도로 구닥다리였다.
CD와 LP를 판매하는 음반 가게도 조금 있었다. 자주 가는 레코드 샵에서 보기 어려운 음반들이 정말 많았다.

Steve Riech의 음반을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미니멀리즘 아티스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2집도 처음 봤다. 1집과 3집은 꽤 자주 봤는데.
가게들마다 컨셉이 달랐는데, 어떤 가게는 한국 음반만, 어떤 가게는 외국 음반만, 그리고 또 다른 가게는 클래식 음반만 취급했다. 우리 모두 음악 취향이 비슷했기 때문에 정말 재밌게 구경했다.

나는 곧 엄마 생신이라 CD를 하나 사드렸다. 엄마 차는 낡아서 CD 플레이어가 내장되어 있는데, 이것도 요즘 나오는 차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 또한 노스텔지어가 아닐까?
4층과 5층에 특히 볼 게 많았다. 게임기와 패키지 게임들을 모아둔 코너가 따로 있었는데, 아쉽게도 옛날 게임들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최소 PS4 이후 게임들이었다… 근처에 골동품 게임기를 판매하시는 아주머니도 계셨는데, 게임에 대해 엄청 잘 아셨다. 꽤나 마이너한 게임인데, 이게 언제 발매된 게임인지도 다 아시더라. 오래된 게임 잡지나 관련 서적이 전시되어있는 가게도 있었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의 개척자인 <동급생> 관련 낡은 책자도 있었는데, 버젓이 전시해둔 게 신기했다. 이게 용산인가?
게임 코너에서 사진을 안 찍은게 너무 아쉽다. 상인들이 많아서 사진 찍기엔 조금 쫄리긴 했다 ㅎㅎ,,
나는 전자랜드를 나오면서 조금 아쉬웠다. 보고 싶었던 것들의 10%도 못 본 느낌이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아무 상가나 들어가서 조금만 더 구경해보기로 했다.

전자랜드 맞은편에는 이런 상가가 하나 있다. 이 상가가 개인적으로 이번 탐험에서 가장 소중했던 경험인 것 같다.

오랫동안 게임을 수입해오던 가게를 찾았다! 친구가 내내 찾아다니던 패미컴도 있었고, PSP와 게임 CD도 찾았다. 개인적으로 PSP 시절이 서브컬쳐 게임 중 가장 낭만 있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게임보이 롬을 모아둔 상자도 있고, 구석에 짱박힌 책장에는 플레이스테이션 2 시절 게임들이 꽂혀있었다. 테이블에는 동키콩 가이드북 같은 게임 책자들도 엄청 많았고, 한정으로 배포하던 특전 같은 비매품들도 많이 있었다. 정말 이런 가게에서 평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렇게 용산 탐험은 끝이 났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내가 그리워하던 과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서브컬쳐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분명히 남아있다. 이 흔적들이 더욱 희미해지기 전에 다시 방문하고 싶다.

노래방도 다녀왔는데, 이게 뭔 조합이냐,, 씹덕 힙찔이 포붕이 에휴